이번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믿는 몇 가지 독특한 이슈들—생일과 특별한 날들, 수혈, 그리고 군대—등을 다루려고 합니다. 생일에 대하여 여호와의 증인이 말하는 생일과 특별한 날들에 대한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래는 생일과 특별한 날에 대한 여호와의 증인 글을 요약한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날을 정하여 축하(celebrate)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단지 두 번의 생일잔치가 나옵니다. 하나는 창세기 40장에 나오는 바로의 생일잔치이고 또 하나는 마태복음 14장에 나오는 헤롯의 생일잔치입니다. 이 둘은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잔치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생일잔치는 중단해야 합니다. 이러한 잔치들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생일잔치 그리고 헤롯의 생일잔치 모두 이방인들의 축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부활절은 이방신을 섬기는 날입니다. 이는 아시리안 여신을 섬기는데서 유래했습니다. 성경에는 크리스마스를 축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방인들의 전통을 따르면 안 됩니다.” 그러면 기독교에서는 생일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생일에 관한 구절을 보면 생일을 축하하는 그 자체를 금지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바로의 생일축하를 금지하거나 또는 헤롯의 생일 축하를 금지하기 위해 생일에 관한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40장에 있는 바로의 생일에 관한 구절에서 우리에게 교훈하는 내용은 단지 바로의 생일날에 왕을 화나게 한 술관원장을 바로가 죽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바로의 생일에 대해 하나님의 판단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로가 생일날에 술관원장을 죽인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틀린 것인지에 대한 해석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바로의 생일날에 왕을 노하게 한 술관원장을 죽였다는 사건을 기록하면서 생일잔치가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를 판단하려고 그 사건을 성경에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술관원장이 적과 모의를 하여 왕의 술에 독약을 넣는 것이 바로에게 발각이 되었다면 왕은 마땅히 그를 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방의 왕인 바로의 생일에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있었으니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생일잔치를 벌이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연계하는 것은 아주 무리하게 성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의 헤롯의 생일잔치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는 세례요한이 어떻게 헤롯에 의하여 죽게 되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헤롯의 생일에 헤롯의 아내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게 됩니다. 헤롯은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무엇이든지 달라고 하면 주겠다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맹세를 합니다. 그런데 전혀 뜻하지 않게 헤로디아의 딸은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고 합니다. 헤롯의 맹세는 너무 분별력이 없는 경솔한 맹세였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바로의 생일잔치도 그랬지만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인 헤롯이 생일잔치를 한 것이 잘못 되었다는 하나님의 판단이 전혀 없습니다. 마태복음 14장도 생일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헤롯의 경솔한 말 한마디가 세례 요한을 죽이게 되는 끔찍한 사건이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도 생일을 축하하지 말하고 금지하는 곳은 없습니다. 성경에 의로운 자가 생일을 지켰다는 이야기나 나옵니까? 욥기 1장에 동방의 의로운 자 욥의 자녀들에 대한 생일이 나옵니다. 신세계역 성경에 보면 욥의 아들들의 “정해진 날”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욥기 1장 4절(신세역) “그의 아들들은 각자 정해진 날에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벌이고, 세 누이도 초대하여 함께 먹고 마셨다.” 히브리 단어 יוֹמ֑וֹ(jomo)가 쓰였습니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그의 날”입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그의 날”이 “그의 생일날”이라고 해석합니다. 욥 1장 4절에 쓰였던 동일한 단어 יוֹמֽוֹֹ(jomo)가 욥기 3장 1절에 쓰였습니다. 욥 3장 1절을 보면 “그의 날”이 그의 생일을 말하는 것이 아주 분명합니다. 욥기 3장 1절(신세계역) “그후 욥이 입을 열어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한글개역 그리고 영어 NIV 에서도 “그의 날”을 “생일”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욥기 1장 4절(개역)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 Job 1:4 (NIV) His sons used to hold feasts in their homes on their birthdays… 의로운 욥의 가정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10명이나 되는 욥의 자녀들이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 각자의 생일날에 큰 잔치를 열어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욥기에서 우리가 보듯이 성경은 생일을 기념하는 자체에 대하여 정죄하지 않습니다. 생일을 축하하거나 축하하지 않거나 그것은 각자가 판단할 일입니다. 한 사람의 태어남을 축하한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생일축하를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절기에 대하여 교회의 절기인 부활절과 크리스마스를 살펴보겠습니다. 부활주일을 축하하는 그 근원은 이방종교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째 되는 새벽에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날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메세지는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본래 구약의 성도들은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렸는데 크리스천들은 안식일 다음날인 예수님의 부활의 날을 기념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안식일이 아닌 부활 주일을 예배드리는 날로 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명하지 않는 절기를 지키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일까요?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명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레위기에 하나님이 직접 명하신 여러 절기가 나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여러 절기 중 가장 중요한 날은 이스라엘 백성의 독립기념일인 유월절입니다. 크리스천들은 크리스마스를 지키지만 유대인들은 그 절기에 “하누카”(Hanukkah)를 지킵니다. 그런데 이 “하누카”는 하나님이 지키라고 명했나요? “하누카”는 “마카비”라는 유대인이 기원전 165년에 성전을 봉헌하는 절기로서 12월 25일부터 8일 동안 지킵니다. 유대인들이 지킨 이 성전 봉헌축제가 “하누카”입니다. 그런데 “하누카”는 하나님이 지키라고 명하신적이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성전 봉헌축제인 수전절을 지키신 것을 요한복음 10장 2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2절(신세계역)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봉헌 축제가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하누카”는 하나님이 구약의 백성들에게 명한 절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8일 동안 계속 되는 이 봉헌 축제를 예수님도 의의를 제기하지 않으시고 지키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날은 언제일까요? 우리 믿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날은 당연히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고 크리스마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날이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왜 축하합니까? 우리 죄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구원하시기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절과 크리스마스는 이방 종교에 근원을 두고 있으니까 축하(celebrate)하면 안 될까요? 이방 종교에 근원을 두고 있는 모든 것을 우리는 배척해야 할까요? 만일 이 배척의 원리를 가지고 산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어떤 사람도 이 땅에 살수 없습니다. 우리는 대형 신발회사인 나이키의 제품을 써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나이키는 본래 그리스의 승리의 여신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마시는 에너지 드링크 박카스도 마시면 안 됩니다. 박카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술(酒 wine)의 신이기 때문입니다. 영어 달력에 주일을 Sunday로 표시합니다. 옛날에 로마인들은 해(Sun)를 신으로 숭배하였습니다. 태양신을 숭배하는 날이 Sunday(해의 날)였습니다. 그렇다면 달력에 Sunday로 표기해서도 안 되는 것이지요. 구약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표징이 할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기 이전에 이방 민족들은 이미 할례를 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기원전 2300년에 이집트에서는 할례의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방인의 근원을 두고 있는 할례라는 의식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결혼식 때 주고받는 반지도 이방인의 풍습에서 유래 된 것입니다. 우리가 나이키 제품을 쓰면서 승리의 여신을 섬긴다고 생각하며 신발을 신는 사람은 없습니다. 박카스를 마시면서 그리스신화의 술의 여신과 결부 짓는 사람도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달력에 Sunday를 쓰면서 로마의 태양(Sun)신과 연계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병원에서 포경수술을 하면서 고대 이집트의 할례 종교의식을 염려하는 크리스찬은 없습니다. 또한 결혼하는 신랑과 신부의 결혼 반지를 고대 이방인의 풍습에서 근원 되었다고 문제 삼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은 특정한 날 또는 절기를 지키는 것에 대하여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로마서 14장 5절-8절(신세계역) “5. 어떤 사람은 한 날을 다른 날보다 낫다고 판단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한 날을 다른 모든 날과 같다고 판단합니다. 각자 자기 생각에 대해 온전한 확신을 갖도록 하십시오. 6. 날을 지키는 사람은 여호와를 위해 지킵니다. 먹는 사람도 여호와를 위해 먹습니다. 그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먹지 않는 사람도 여호와를 위해 먹지 않으며, 그 사람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7. 사실 우리 중에는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없고 자신만을 위해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8. 우리는 살아도 여호와를 위해 살고 죽어도 여호와를 위해 죽습니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여호와의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6절(신세계역)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일이나 축제나 초하룻날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아무도 여러분을 판단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기독교에서는 사람에게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지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심을 감사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서 부활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선생님께 바울의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그러므로 … 축제나 초하룻날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아무도 여러분을 판단하지 못하게 하십시오.”(골로새서 2장 16절, 신세계역) 수혈에 대하여 여호와의 증인은 수혈을 거부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수혈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나요? “성경을 사용하여 추리함”에 보면 수혈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의 가르침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레위기 17장 11절과 사도행전 15장 28절-29절을 인용하여 수혈을 거부합니다. 레위기 17장 11절(신세계역) “육체의 생명이 그 피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가 너희 자신을 위해 속죄를 하도록 제단에서 쓰라고 그것을 주었다. 피가 그 안에 있는 생명으로 속죄를 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5장 28-29절(신세계역) “28. 성령과 우리는 꼭 필요한 이런 것들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29. 곧 우상에게 바친 것과 피와 목 졸라 죽인 것과 성적 부도덕을 계속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주의 깊이 떠나 있으면 여러분은 잘될 것입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구약의 레위기 17장에 피를 먹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후로 기독교인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만일 레위기 17장에 피에 관한 규례를 지켜야 한다면 같은 장에 나오는 소나 어린양이나 염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는 일도 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습니다. 피를 먹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오직 인증된 코셔(Kosher) 음식만 먹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은 피를 전혀 먹지 않나요? 일반 마켓에서 고기를 사다가 먹지 않나요? 만일 일반 마켓에서 고기를 사다가 먹는다면 레위기 17장의 말씀에 불순종 한 것입니다. 일반 마켓에서 구매하는 모든 고기에는 피가 있습니다.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나요? 그렇다면 레위기 17장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햄버거에도 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모든 율법에서 자유함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서 자유함을 가지고 삽니다. 피가 있는 음식도 먹습니다. 마켓에서 피가 있는 소고기도 사다가 먹습니다. 맥도날드에서 피가 있는 햄버거를 사서 먹습니다. 로마서 14장 14절, 20절, 21절(신세계역) “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또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 자체가 더러운 것은 없고 다만 더럽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만 그 것이 더럽다는 것입니다. 20. 더 이상 음식 때문에 하느님의 일을 무너뜨리지 마십시오. 사실 모든 것이 깨끗하지만, 먹는 일이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그 것을 먹는 것은 해롭습니다. 21. 고기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고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영어 NIV 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14:14 nothing is unclean in itself 로마서 14:20 … All food is clean… 우리는 율법에서 자유하기 때문에 피를 먹는 일에서도 자유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옛날부터 순대를 즐겨 먹었는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15장의 피에 대한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당시 교회의 대부분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매여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모든 음식은 깨끗하지만—피가 있는 음식을 포함하여—그 음식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된 유대인에게는 큰 시험이 될 수 있으므로 그들을 배려하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인 것입니다. 생명이 위독할 때에 피를 수혈 받는 것을 성경은 금지하고 있나요? 율법을 현재도 지키고 있는 전통적 유대인들도 수혈과 피를 먹는 문제를 전혀 연계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이 둘은 전혀 연관이 없는 문제입니다. 피를 먹는 문제와 결부하여 수혈을 거부하는 종교적 단체는 이 땅에서 오직 여호와의 증인 뿐입니다. 선생님께 질문할게요. “오직 여호와의 증인만이 수혈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를 하고 있나요? 전 세계의 모든 크리스천과 유대인은 수혈에 대하여 그릇된 해석을 하고 있나요?” 피를 먹고 안 먹는 문제 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먼저 아닌가요? 바리새인들은 목숨을 걸고 예수님이 안식일에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반응합니까? 마가복음 3장 1-5절(신세계역)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그분을 고발하려고 그분이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지 눈여겨보고 있었다. 3. 그분이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오십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4. 그런 다음 그들에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습니까, 해를 입히는 것이 옳습니까?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습니까, 죽이는 것이 옳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5. 그분은 분개하여 그들을 둘러보신 뒤에, 그들의 마음이 무감각한 것을 몹시 한탄스러워하시며 그 사람에게 ‘손을 펴 보십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6.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롯당원들과 함께 그분을 죽이려고 모의했다.” 바리새인들은 생명을 구하는 일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더 중요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만약 사랑하는 내 아들이 병이 걸려 수술하던 중 피가 모자라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피를 먹지 말라”는 율법을 생명 걸고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할까요? 아니면 율법도 율법이지만 죽어가는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할까요? 예수님은 어떤 것을 더 기뻐하실까요? 생명을 구하는 것 아닐까요?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를 보도록 합시다. 예방접종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1931년 예방접종은 노아의 언약과 위배되는 것이다. 1965년 예방접종은 많은 병을 줄이는 결과를 낳았다. 장기이식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1968년 장기이식은 식인 의식과 같은 것이다. 1980년 장기이식은 식인 의식과 같다고 볼 수가 없다. 예방접종을 금지하다가 1965년부터 허용하였고 장기이식도 금지하다가 1980년부터 허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언젠가는 수혈 받는 것에 대한 교리도 바뀔 것을 기대해봅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군대에 대하여 대한민국은 1950년-1953년에 전쟁을 치르고 현재는 휴전 중에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북한이 남침을 할지 몰라 늘 불안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북한은 핵을 개발하여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시시때때로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북의 군사적 위협에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가르침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합니다. 우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만을 섬기고 그를 따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국기에 대한 경례는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투표를 해서도 안 되고, 정치에 참여해서도 안 되고, 더 나아가 군대에 참여하는 것도 용납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도 돌려 대라고 하셨습니다. 전쟁을 일으켜 한 나라 사람이 다른 나라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전쟁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만일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면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에서의 가르침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5절-13절에 보면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와 중풍병에 걸린 하인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때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은 그에게 어떻게 반응합니까? 예수님이 로마 군대를 섬기는 군인에게 예수님을 따르려면 당장 군대를 포기해야 한다고 명령하셨나요? 예수님을 섬기는 것과 군대에서 섬기는 것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나요? “백부장, 이 사람아 자네는 왜 사람을 죽이는 군인으로 로마를 섬기는가? 자네의 병 걸린 하인을 고치려면 먼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군대를 제대하여야 하네.” 하고 말씀하셨나요? 그가 로마군대를 섬기는 백부장이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로마군대에 대하여서는 전혀 말씀을 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가 군대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 큰 죄를 짓는 것이었다면, 죄짓고 있는 사람의 믿음을 예수님이 칭찬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백부장이 군대를 섬기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백부장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고 더 나아가 그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이방인 중에 최초로 예수님을 믿게 된 고넬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넬료도 군인이었습니다. 신세계역 성경은 그를 로마 군대의 장교로 소개 하고 있습니다. 고넬료는 로마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22절(신세계역) “그들이 말했다. 고넬료라는 장교가 거룩한 천사에게서 하느님의 지시를 받았는데, 당신을 집으로 모셔다가 당신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의롭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온 유대 민족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에 의하면 고넬료는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로마제국의 군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고넬료가 오늘날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왕국회관에 회원이 될 수가 없습니다. 군인으로 섬기는 것을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경도 고넬료를 군대에서 로마를 섬기는 죄인으로 이해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0장 22절에 고낼료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의롭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온 유대 민족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로마를 섬기는 군인인데 말입니다. 또 한 사람이 나옵니다. 세례요한 앞에 나온 군인들입니다. 세례요한의 말씀을 듣고 그는 마음에 찔렸습니다. 군인이 질문합니다. 누가복음 3장 14절 “군병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 여호와의 증인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경은 군인으로 섬기는 것을 금지함으로 세례요한이 군인을 그만 두라고 말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군대를 그만두라고 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군인들에게 이렇게 답변합니다,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온 백부장, 베드로 사도에게 복음을 전해 받은 고넬료, 그리고 세례요한에게 나온 군병들에게 모두 군인의 삶을 포기하라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군인으로 섬기는 것을 반대한다는 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선생님께 여쭙겠습니다. 만일 선생님 집에 칼과 총으로 무장한 강도가 들어와 여러분 자녀를 강간하고 죽이려 한다면 그냥 내 사랑하는 자녀가 괴한들에게 당하도록 보고 있는 것이 옳은 판단일까요? 더 나아가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적에게 침공을 당하고 있고, 내 사랑하는 가족 모두가 몰살 위기에 있으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만일 한국군과 연합군이 대항해서 싸우지 않았다면 한국은 그 당시에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적화통일이 되어서 전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나라가 되어 있지 않겠어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몰살당하지 않았겠습니까? 북한군이 쳐들어왔을 때 전혀 무방비 상태로 싸우지 않고 나라를 공산당들에게 넘겨주어야 했을까요? 그것이 올바른 판단이라고 생각하세요? 누군가는 나라를 적으로부터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성경에 죽음으로 끌려가는 자를 방관하라고 하였나요? 잠언 24장 11-12절(신세계역) 11. 죽음으로 끌려가는 자들을 구해 내어라. 살육당할 처지에 놓인 비틀거리는 자들을 붙들어 주어라. 12.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몰랐습니다.”하고 네가 말한다 해도, 마음을 살피는 분이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시겠느냐? 너를 지켜보는 분이 아시고 각자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무고한 사랑하는 내 자녀가 괴한에게 위험을 당해도 구해주어야 하지만 무고한 내 나라의 백성이 적에게 총과 무기로 공격을 당해도 내 나라를 적에서 구하여야 하지 않을까요? 전쟁을 하지 않고 내 나라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킬 수 있습니까? 군인이 없이 내 나라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킬 수 있습니까? 군대에 대한 여호와의 증인의 가르침이 1951년도에 바뀌었습니다. 1903년 군대에 가는 것은 양심에 위배 되는 것이 아니다. 1951년 여호와의 증인이 군대에 가는 것은 양심에 위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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